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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자라는 정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생각에 잠기는 외로운 시간을 정적 속에서 보내 본 사람만이 따뜻한 시선과 사랑으로 사물을 가늠하고 영혼의 바탕을 보고, 인간적인 모든 약점을 관대하게 이해할 수 있다. 낮으로, 밤으로, 동굴로, 그 어딘가로.무자비하고 사납고 소란스러웠던 날도 어머니 같은 밤이 포근히 감싸주고 나면 우리는 다시 일어나서 힘차게 발장구치며 수영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  헤르만 헤세 : 밤의 사색 중-


삶은 오로지 깨어 있는 의식을 통해서만 부여할 수 있는 상태이자사실이다. 하지만 깨어 있는 의식은 우리가 일어나고 밥을 먹고 다시 잠자리에 드는  일상과는 별개로 흘러간다. 

오리가 물 위에 떠 있기 위해 물속에서 부단히 발을 움직이듯, 반복되는 일상을 수면위로 끌어올리기 위해 우리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든다. 하지만 일상을 살아가는 당연함을 잊은 사람들은 수면위로 일상을 끌어 올려야 하는 이유를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필사적으로 진정한 삶의 순간을 찾는다. 그들에게는 해가 뜨기 전까지의 시간이 삶을 위한 노력이며, 의식이 깨어 있기 위해 달리는 끝이 안 보이는 길고 어두운 터널일 것이다.

 <밤에 자라는 정원>은 해가 뜨면 시작되는 일상을 영위하기 위한 전 단계인 밤의 시간을 시각화 한다. 이 시간은해가 뜨고 일상생활이 시작되면 순식간에 사라져버려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휘발되기도 한다. 이러한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시간의 특성은 투명하고 위태로운 비닐로 된 집으로 가시화된다. 이 비닐의 집은 외부와 구분되고 단절되지만,안이 보일 정도로 얇고 투명한 비닐로 되어 있어 연약함을 자아낸다. 타이틀<밤에 자라는 정원>은 이러한 비닐의 집을 상징하며,하나의 내면이자 사회와 단절된 어떤 개인적인 공간을 표상한다.


 황차영(한란)은 ‘잠’에대해 말한다. 사회에 대한 억압에서 해방되기 위해 잠을 하나의 해결 수단으로 사용했던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작품을 서술한다. 작가에게 잠은 스스로 택한 하나의 작은 죽음이며, 불안이 깊어질수록 그 잠은 ‘죽음보다 더 깊어’ 진다.

 작품 속 잠을 자듯 누워있는 나체의 인물들은 불안한 현실을 살아가는 본인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대변한다. 하지만 이들은 날이 밝아오면  잠에서 깨어나 매일매일 끝내 죽지 않고 다시 살아간다. 결국,죽음은 삶에 대한 복귀로, 삶은 죽음으로의 귀가로 이어진다. 이런 의미에서 잠은 죽음이기도하지만 동시에 삶을 견디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송다영은 삶을 살아가게 해주는 원동력인 내재적 의지인 '힘'에 집중한다.  힘은 무엇을 원하고자 하는 의지를 의미하고 내밀한 자아의 세계 속에서 발생한다. 작가에게 힘을 발생시키는 원천은 내면에 저장된 과거의 기억과 경험이다. 이러한 기억과 경험을 마주함으로써 심리적인 위안을 얻고 힘을 발생시킨다. 지나간 과거들은 고요한 밤과 새벽의 시공간 안에서 예고없이 찾아와 신비로운 몽상을 보여주며 마음의 위로를 건네준다. 내면의 자아 세계는 만들어낸 몽상 안에서 생기를 지닌 힘을 표출시켜 더 나은 삶을 긍정하고자 한다.


 이소정(memii)은 파괴에 대해 탐구한다. 작가는 가상의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앞세워 이들의 신체를 절단하고 부수며 파괴한다. 하지만 이 캐릭터들은 웃고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표정을 짓는다. 작가는 캐릭터를 앞세워 이러한 파괴 충동과 이러한 충동의 유혹적인 성질에 대해서 탐구한다.  


이 전시에서의밤은 물리적인 시간보다 심리적인 시간을 의미한다. 이러한 밤의 시간은 각각의 개인들이 일상을 위해 마주하고 각성하는 순간이다. 일상 속에서 마주한 밤은 각각의 의미로 황차영(한란), 송다영, 이소정(Memii)의 작품 안에서 모색하고 있지만 삶을 위한 의식의 전 단계를 내포한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이들의 작업은 “밤에 자라는 정원”이라는 장소에서 조우하며,‘죽음보다 깊은 잠’, ’찬란한 어둠’, ‘파괴의 리듬’이라는키워드로 각기 다른 밤에 대해 묘사한다.